5·18 45주년>"끝까지 싸우자는 약속"…죽음 불사한 최후 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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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45주년>"끝까지 싸우자는 약속"…죽음 불사한 최후 항전
●소년이 왔다,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2>‘광주의 밤’ 지킨 시민군
이양현·김효석씨, 마지막날 회고
계엄군 ‘무기 미반납 진압’ 통첩
340여명 결사항전 속 25명 숨져
“나만 살아남았다” 평생 죄책감
  • 입력 : 2025. 05.12(월) 18:42
  • 정유철·윤준명 기자
1980년 5·18민주화운동 기간 광주 전남도청 광장(현 5·18민주광장) 일대에서 궐기대회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 오월어머니집 제공
“‘우리가 물러서면 광주시민들은 폭도로 기록될 것이다. 결국 모두 죽겠지만, 두려워 말고 끝까지 싸우자’고 다짐했죠.”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수습위원으로 활동했던 이양현(당시 30세)씨는 ‘해방광주’의 마지막 순간을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았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계엄군이 철수하고, 이튿날인 5월22일부터 시민들은 매일 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열며 결의를 다졌다”며 “하지만 날이 갈수록 ‘재진입은 시간문제’라는 긴장감이 확산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26일 새벽, 그 불안은 현실이 됐다. 오전 4시께, 외곽을 봉쇄하던 계엄군 병력이 농성광장, 대동고, 무등경기장 인근까지 진입했다. 이에 홍남순 변호사 등 수습위원 17명은 ‘죽음의 행진’으로 계엄군을 막아섰으나, 곧이어 ‘자정까지 무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진압하겠다’는 통첩이 시민군에 전달됐다.

1980년 5월27일 당시 옛 전남도청과 YWCA 건물에서 계엄군과 맞선 이양현(75·왼쪽)·김효석(63)씨
이씨는 “그날 오후 3시, 제5차 궐기대회에서 항쟁 지도부는 ‘오늘 밤 공격 가능성이 크다’고 시민들에게 전했다”며 “이어 오후 5시, 외신과의 기자회견에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과 함께 참여했다. 윤 대변인은 ‘끝까지 싸우겠다’는 각오를 세계에 표명했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이 끝난 오후 8시께, 도청에서 한 남성이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죽어도 좋다는 사람은 남아 달라”고 외쳤고, 약 200명의 시민이 시민군에 합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들은 YMCA 건물 1층에 모여 예비역들로부터 간단한 총검술과 진지 구축 교육을 받았다. 도청과 YWCA에 있던 어린 학생들과 취사 업무를 맡았던 여성들에게는 귀가가 권유됐다.

이씨는 “학생들에게 ‘돌아가서 역사의 증인이 돼 달라’고 회유했지만, 떠난 이는 많지 않았다”며 “나도 아내를 집으로 보내면서도 살아서는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라 생각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후 도청 일대에는 약 200명, YWCA에는 30여명가량이 남았으며, YMCA·전일빌딩·대인동 시외버스터미널·계림국민학교와 같은 주요 거점에도 각 10여명이 머무르는 등 총 340여명의 시민군이 배치됐다.

항쟁기간 윤상원 대변인의 비서로 활동한 김효석(당시 대동고 3년)씨도 죽음을 각오한 채 YWCA에 남았다. 그는 총을 받아 들고, 남은 이들과 무력 진압에 대비한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김씨는 “나가면 살고, 남아 있으면 체포되더라도 사살될 것으로 생각했다”며 “항쟁의 기억을 증언하겠다는 이들은 떠났고, 남은 우리는 패배를 직감하고도 ‘결사항전’의 뜻을 굳혔다”고 회상했다.

밤이 깊어지자, 시민군들은 지친 몸을 잠시 누이거나, 눈을 붙였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은 27일 오전 2시께 계엄군의 도심 진입을 알리는 경고 사이렌과 함께 깨졌다.

오전 3시30분께, 시민군은 분주히 방어 준비를 마쳤고, 이 시각, 홍보부 박영순씨는 도청 상황실에서 마지막 방송을 했다. 옥상 스피커를 통해 그녀의 처절한 음성이 시내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30여분간의 방송이 끝나자 이씨는 도청의 전기 공급을 차단했다.

김씨는 “도청의 방송이 잦아들자, 곧이어 계엄군이 YWCA와 도청을 포위했다. 헬기가 저공비행하며 항복을 종용하고, 공격을 개시했다”면서 “계엄군은 건물로 진입해 시민군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거나 사살했다”며 참혹한 기억을 되짚었다.

그 시각, 이씨는 윤 대변인과 함께 도청 2층 민원실에 대기하고 있었다. 총성이 들려오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다. 저승에서 다시 보자”고 인사를 나눴다. 3~4분 뒤 후문이 뚫리면서 윤 대변인이 피격돼 숨졌다. 저항하던 이씨는 끝내 항복했으며, 이내 도청은 함락됐다.

입구가 하나뿐인 YWCA는 도청보다 비교적 오래 항전했고, 역시 격렬한 총격전이 이어졌다. 김씨는 전신에 파편상을 입은 동료를 끌어내려다 계엄군에게 체포됐다. 동이 트며 시민군의 저항은 분산됐고, 10일간의 피의 항쟁도 끝을 맞았다.

그날 도청에서는 윤상원·문재학 열사를 포함해 시민군 15명이, YWCA에서는 박용준 열사 등 2명이 계엄군의 총탄에 사망하는 등 광주 도심에서 총 25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양현씨와 김효석씨를 비롯한 살아남은 이들은 ‘극렬분자’로 낙인찍혀 상무대로 끌려갔고, 긴 고초 끝에 풀려났지만, 동지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나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은 평생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들은 “45년이 지났지만, 오월 광주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날을 함께했던 사람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든다”며 “영령들이 편히 눈 감을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는 마지막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유철·윤준명 기자
5·18 45주년>80년 5월27일 광주의 새벽, 민주주의 승리 이끌어
5·18 45주년>윤상원 “오늘 진다고 해도 영원히 패배하진 않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