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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국민 모두의 것이어야 하지만, 현실 속 민주주의는 늘 모두의 것이 아니었다.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는 종종 지워졌고, 정책은 권력자나 소수 엘리트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곤 했다. 그런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불신을 낳고, 약자를 더욱 고립시킨다. 결국 민주주의가 제 역할을 하려면,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여자’로서 깨어 있어야만 한다.
2014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세월호 참사는 이러한 시민의 각성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304명의 무고한 생명이 바다 속에서 희생되어가는 동안, 국가는 무능했고 무책임했다. 그러나 참사 이후를 바꾼 것은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이었다. 유가족들의 간절한 외침에 공감하며 거리로 나온 사람들, 잊지 않겠다며 기억 공간을 지키고, 기록하고, 연대하던 이들이 만들어낸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촛불을 들고 함께 서 있던 시민들은 이제 더 이상 ‘통치받는 자’가 아니라 ‘묻고 따지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자각을 시작했다. 그 질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왜, 누구를 위해, 어떤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가?”
이와 같은 시민 참여의 힘은 사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 깊은 유산으로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들은 계엄군의 총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날의 광주는 단지 저항의 도시가 아니었다. 질서를 지키고, 약탈을 막고, 연대하며 공동체를 지켜낸 시민 자치의 도시였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맞서면서도 공동체의 윤리를 저버리지 않았던 그 정신은 지금까지도 살아 숨 쉬며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는 힘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확장은 오늘날 새로운 세대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기후위기의 시대, 청소년들은 더 이상 관찰자나 보호받는 존재로 머물기를 거부한다.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로 대표되는 청소년 기후운동은 이제 한국에서도 ‘청소년 기후소송단’이라는 이름으로 현실 정치와 제도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이들은 탄소중립 목표 미이행에 대해 정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일상 속에서 실천과 교육, 정책 제안까지 주도하고 있다. 나이와 권한의 문제를 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혹자는 민주주의는 거창한 정치적 구호나 선언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결단코 ‘아니다’. 때로는 마을 회의에서 쓰레기 문제를 토론하는 주민들의 모습 속에서, 때로는 장애인 이동권을 외치며 도로 위에 앉은 이들의 행동 속에서, 때로는 익명의 시민이 공익 제보를 고민하며 써 내려간 편지 속에서 진짜 민주주의는 존재한다. 그 모든 작고도 소중한 참여들이 모일 때, 우리는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에 가까워진다.
깨어있는 시민은 완벽하거나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아이를 키우며 사회의 안전을 걱정하는 부모, 아침 지하철에서 기후 뉴스를 읽는 청년, 마을의 나무 한 그루를 지키기 위해 동네 모임에 나오는 주민 이들 모두는 민주주의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모두, 그저 평범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시민으로서, 민주주의라는 저수지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물음 하나일지 모른다. “나는 오늘, 공동체의 민주주의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는가?” 묻고, 듣고, 행동하며, 서로를 연결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민주주의라 할 수 있으며 우리 모두가 그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