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이승현> 옛 편지를 읽으며 여름에 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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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열며·이승현> 옛 편지를 읽으며 여름에 물들다
이승현 강진 백운동 원림 동주
  • 입력 : 2024. 07.31(수) 18:26
이승현 강진 백운동 원림 동주
요즘 청문회로 야단법석이다. 고위 공직자 또는 고위공직을 맡을 분들이 청문회장에 나와서 본인의 과거 행적과 감추려는 비밀들이 까발려져 곤욕을 치르고 있다. 그 꼴 들을 보자니 강진 백운동 원림에 건립되는 전시관에 맡길 유묵들을 정리하다 본 다산의 편지가 떠 올랐다.

“남이 모르게 하고 싶으면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남이 듣지 못하게 하고 싶으면 말을 하지 않는 것만 한 것이 없다. 천하의 재앙과 우환, 천지를 뒤흔들며 자신을 죽이고 가문을 뒤엎는 죄악은 모두 비밀리에 하는 일에서 빚어지는 것이니 일을 할 때나 말을 할 때는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편지 한 통을 쓸 때마다 두 번, 세 번 읽어보고 마음속으로 빌어야 한다. ‘이 편지가 큰길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열어보아도 내게 죄를 주는 일이 없겠는가?’ ‘이 편지가 수백 년을 전해 내려가 수많은 지식인에게 공개되어도 나를 조롱하는 일이 없겠는가?’ 그런 다음에 봉투를 붙여야 한다. 나는 젊어서 글씨를 빨리 쓰다 보니 이런 경계를 무시하는 일이 많았다. 중년에는 재앙이 두려워 점차 이 방법을 지켰는데 아주 도움이 됐다.”

다산이 강진에 왔다 돌아가는 아들에게 준 편지글이다. 참으로 무릎을 치게 되는 경계(警戒)이다. 청문회장에 불려 나온 인사들, 용산의 아방궁이나 크고 작은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다산의 경계를 가슴에 새겨 지키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자신을 죽이고 가족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아! 한순간에 자신과 가문이 몰락해 버린 다산의 뼈저린 후회가 들리는가. 다산이 앉아 차를 마시던 백일홍꽃 붉은 백운동 원림 수소실에서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뭉클해 왔다.

강진 백운동 전시관에 전시될 전시물 중에는 유독 옛사람들의 편지가 많았는데. 학문의 토론부터 집안 대소사, 지인들 간의 안부나 사제 간의 교육 등 개인사, 가족사, 문중사, 정치사 등이 모든 일상과 시대상은 물론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내용들이 담겨 있어 흥미롭다. 다산이 백운동으로 보낸 차(茶) 제다법이 담긴 편지처럼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 되기도 한다. 편지가 이렇게 다양한 역할과 콘텐츠가 된 것은 그 당시 소통 수단이 간찰이라는 편지가 유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산 문집에 실린 편지가 220여 통 전해지고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흩어져 있던 편지 120여 통을 모아 다산 간찰집으로 펴냈으니 드러난 것만 300여 통이 훨씬 넘는다. 다산 간찰집에 수록된 편지를 100여 통 읽다 보니 한편, 한편 인생의 희노애락과 풍상(風霜) 이 담겨있다.

요즘 짧고 간결한 형태의 콘텐츠인 숏폼의 시대라고 하는데 옛사람의 편지가 그 전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형식과 내용, 용도가 다양했다.

“선비가 입신하여 임금을 섬김에는 오직 이 목민(牧民)이라는 한 가지 일만 있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마음을 씻고 정성을 다한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실의(失意)하게 되어 백성을 윤택하게 할 길이 없어지자, 옛사람이 남긴 언행 40권을 모아 <목민심서>라 이름 지었습니다. 지금은 읽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형(兄)께 처음으로 이 책을 드리니 제사가 지난 뒤에 함께 이 책을 검토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이 편지는 1820년 한익상에게 쓴 것인데 이 편지로 목민심서 초고가 완성된 시기와 창작자들이 정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사흘 만에 장사 지낸 것이 비록 유언을 따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끝나자마자 편안하게 집에 있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네가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5월에 돌아온다면 3개월 장례를 치른 것과 같은 예법이 된다. 내일 산소 아래로 나아가서 초하루와 보름에만 집에 돌아와 제사를 지내고 그 밖에는 산소에 있어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무덤에 곡을 하고 또 한낮에 또 곡을 해라. 이렇게 5월 보름까지 해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사흘 만에 산 속에 두고는 집안사람 중에 모시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면 이는 오랑캐에 가깝지 않겠느냐. 반드시 결단해서 행하도록 해라.’

다산이 강진 제자 황상에게 보낸 것으로 그 당시 장례의 예법을 알 수 있는 편지글이다. 요즘의 장례식과 비교해보면 극한의 장례문화로 볼 수 있지만 지금의 장례식이 마치 주검 처리 기간이라 느낄 만큼 형식적이고 의무적이라 허전하고 송구함을 감출 수 없다. 형식이 의식을 좌우한다고 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모바일 중심의 현대인의 생활 방식에 쇼츠, 틱톡, 릴리 같은 수단들이 편지, 교육, 학습, 폭로 등을 대신하고는 있지만 확산성이나 신속성으로 보자면 편지와 비교할 수도 없는지라 자신과 상대방, 집단을 망치는 사고가 많아 신중해야 하고 규제가 더해져야 한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위문편지나 부주전 상서 같은 문안 편지, 혼인 때 상대에게 보내는 사주단자(四柱單子) 같은 수고로운 정성이 그립기도 하다. 더구나 쓰는 이의 성품이나 인격, 개성이 드러난 글씨도 볼 수 없고 고인을 추억할 수 있는 그 편지가 하나의 작품이 되고 유품도 될 수도 없으니 아쉬울 수 밖에 없다. 백운동 원림을 조성한 1대 동주부터 12대 동주까지 시문과 사주단자, 문중 계책, 유언, 가훈 같은 친필 편지를 모아 족자로 만들어 걸어 놓으니 머나먼 산소에 가지 않아도 선대 조상들을 뵈는 것 같고 숙연해진다. 전시관에 걸고 관람객에게 보여도 구경거리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360여 년 이어온 종가의 궤적과 동주들의 삶의 흔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재산을 모으고 유명한 그림을 수집하는 것도 좋지만 고려청자가 아니어도 가족들의 편지를 쓰고 모아 보전한다면 그것이 가보(家寶)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