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평 생고기비빔밥은 싱싱한 한우와 고소한 참기름이 만들어내는 맛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어가고 있다. 요즘 휴가철에는 함평 생고기비빔밥을 먹기 위해 전국에서 찾아드는 식도락가들이 넘쳐나 평일에도 번호표를 뽑아 대기할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먹음직스런 비빔밥. 함평군 제공 |
요즘에는 접시 째 나오는 생고기말고도, 갖은 양념을 한 육회가 있고, 육회를 얹은 비빔밥도 있다는 것, 그리고 보기보다는 맛이 솔찬하다는 것 쯤은 안다.
분명 서울에도, 부산에도 쇠고기를 날로 먹는 식당이 있다. 하지만 미식가들은 남도가 원류라고 믿고, 남도에서 먹는 쇠고기 생고기, 육회, 비빔밥이 최고라고 한다. 맛의 고향이 남도니 의레 그럴 것으로 믿는다.
게 중에도 생고기로 유명한 곳이 함평이고, 함평오일장이 열리는 함평시장 일대 식당가이다. 함평장은 2,7일에 열린다. 대형마트가 등장하기 전, 없는 것이 없던 오일장은 잔칫날이었다. 집채 같은 몸집을 자랑하는 우람한 소들이 모이는 우시장이 가장 큰 판이었다. 흥정 소리는 '핑겡(핑경)'소리보다 커야 했다. 돈뭉치를 주무르는 쇠장수들의 호기에, 우시장 옆 도축장에서 갓 나온 생고기는 고소한 참기름장 종재기에 연신 들락거렸고, 함평 생고기는 역사가 되어갔다.
함평 내륙은 낮은 산에 안긴 평지가 많아 풀밭이 펼쳐졌고, 소 키우기 알맞은 곳이었다. '함평 천지'란 말은 너른 벌판과 갯벌, 물 좋고 공기 좋아 살기 좋은 곳이라는 자부심에서 나왔다. 함평 우시장이 흥청거린 것은 1900년대 초기부터라고 한다. 하루 700마리, 800마리가 거래됐다 하니, 함평 우시장은 그 때 도떼기시장이었으리라. '함평 우시장 값이 전라도 소 값'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우시장의 명성은 애잔해졌으나 생고기 이름은 남아있다. 현재 함평읍내 94개 식당 가운데 78%인 73개 식당은 한우생고기비빔밥을 내놓는다. 함평시장 일대 식당들은 언론보도 등을 통해 생고기비빔밥이 알려지면서 요즘 주말에는 번호표를 받아야할 만큼 인기다. 한국관광공사와 함평군은 이곳을 '생비빔밥 테마거리'로 선정, 음식관광에 정성을 쏟고 있다
사실 비빔밥이야 한국 고을 어디에나 있다. 조선시대 후기 5대 비빔밥으로 평양, 해주, 전주, 진주, 통영을 꼽았다. 5대 비빔밥이 관객 1000만명을 동원한 영화라면 함평 생고기비빕밥은 매니아층용의 독립영화. 맥도널드 햄버거가 아니라 수제 햄버거라고 할까.
생고기 재료는 소의 엉덩이 안쪽 볼기살로 우둔(牛臀)살. 짙은 선홍색, 잘 익은 버찌 빛깔이다. 잡은 지 몇 시간 안에 먹어야 좋다지만 대개는 냉장 혹은 냉동보관하다 요리한다. 요즘은 도축시 낱낱이 검사해 질병 의심이 있는 소는 전량 폐기하는 만큼 정상 유통되는 생고기는 안전하다.
생고기 재료인 볼기살은 결 따라 숭덩숭덩 썬다. 비빔밥에 따라 나오는 국은 맑은 선지국이 원칙이고, 돼지비계를 담은 접시가 곁들여지는데 취향에 따라 비벼 먹기도 한다. 싱싱한 갖가지 채소가 놋그릇을 가득 채운다. 여린 애호박나물, 국산 참깨에서 짜낸 기름, 선지국물에 삶아낸 콩나물, 계란 노른자, 양념장, 김 가루….
색깔도 궁합이 맞아야 한다. 양념을 하지 않은 붉은 색 살코기, 노란 계란 노른자, 녹색 채소류와 검은 색 김가루. 눈앞에 놓인 비빔밥 그릇은 색동옷 입힌 듯, 오방색 보자기 같다. 참기름 고소한 냄새가 코를 간질이면 입 안 가득히 행복을 넘길 시간이다. 함평 생고기비빔밥에는 다대기를 넣기에 고추장을 따로 넣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고추장 없는 비빔밥은 상상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고추장 종지가 나온다.
육회를 뜨악해했던 필자 같은 생고기 초심자는 주문할 때 말해두면 선짓국 육수에 데친 고기가 생고기 대신 나온다. 육회돌솥비빔밥을 파는 곳도 있다. 매운 걸 먹기 힘든 어린이와 외국인을 위해 간장으로 비벼먹는 비빔밥도 있다.
너무 먹어 탈나는 요즘, 함평 비빔밥을 먹고 소화시킬 겸 나들이를 해보자. 봄이면 나비대축제가 열리는 함평엑스포공원에는 나비와 민물고기 곤충의 표본과 실물을 갖춘 전시관이 있다. 여름철 돌머리해수욕장에서는 갯벌체험을 즐기거나 보리새우(일명 오도리)를 초장에 푹 찍어 먹는 즐거움이 있다. 8월 하순~9월 초순의 꽃무릇 축제 때 영광, 함평군에 걸쳐진 불갑산과 모악산 일대는 붉은 주단을 깔아놓은 것 같다. 10월말 늦가을에는 수 만 송이 국화로 수놓아진 국향축제가 열린다.
함평군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와 대유학자의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군의 최북단 신광면에는 일강 김철(一江 金澈ㆍ1886~1934 )선생을 기리는 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상해 임시정부청사 건물도 재현해놓았다. 서울법대의 전신인 경성법률전수학교를 나와 일본에 건너간 김철선생은 메이지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귀국해 노비를 풀어주면서 땅을 나누어 주었다. 재산을 팔아 목돈을 마련한 뒤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살림을 뒷받침했다. 임시정부 내각의 일원이었던 그는 김구선생과 대한애국단을 이끌며 독립투쟁에 헌신하다 과로로 얻은 병으로 48세에 타계했다. 작은 아버지 김철 선생의 뒤를 따라 망명한 두 조카, 김석과 김덕근 역시 독립운동 유공자로 추앙받고 있다. 혁혁한 독립운동가 세 분이 영산(永山) 김씨 구봉리 일가에서 나왔으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기념관을 돌보고 있는 후손 김만선(金萬善?65)씨는 무더위 속에 잔디밭 잡초를 손으로 뽑아내다말고 안내를 자청한다.
"무덤가 저 큰 소나무가 단심송(丹心松)이요. 독립운동을 떠난 남편 때문에 일본 놈 헌병과 순사한테 시달리다 못해 부인께서 목을 매셨다고 합니다"
가사 일 잊고 오로지 독립운동 해달라는 김해 김씨 부인의 간절한 염원이 아직도 덜 풀려서일까, 소나무 입새는 무섭게 짙푸르다.
조선시대 꿋꿋한 선비 정신은 함평군 엄다면 제동마을 자산(紫山)서원에서 만날 수 있다. 정치적 논란 속에 5번이나 훼철(毁撤)을 겪은 비운의 서원이다. 호남을 대표하는 명유인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ㆍ1529~1590)과 동생을 모시고 있다. 윤선도는 "동방의 진짜 유학자로 이황에 버금간다"고 곤재 선생을 평했다. 나주 출신으로 당쟁을 피해 관직을 거부한 그는 이곳에 윤암정사를 짓고 수많은 제자를 키웠다. 복원 정비된 후 30년도 안된 서원이건만 관리동 문은 바람에 덜렁이고, 잡초 우거진 사당의 문은 잠겨 있다. 문풍지에는 누군가 뚫어 놓은 구멍이 휑하다. 곤재 선생이 남긴 시, '영탄(詠懷:속내를 읊다)'이 새겨진 비석 앞에서 한동안 발길을 뗄 수 없다.
"오막살이 시렁 가득한 책 속 백년 인생 절반이 가네. 성현의 길 가려했건만 알아 줄 이 없어 묻혀 사네."
행정학 박사ㆍ전 동아일보 도쿄특파원ㆍ전 선문대 교수ㆍ현 전남도청 연설문 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