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권 따줄게, 직장 봐줄게… 주머니 노리는 검은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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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권 따줄게, 직장 봐줄게… 주머니 노리는 검은손들
우리 곁의 고려인 잇단 사기 피해… 범죄 표적
불안정한 체류ㆍ언어 장벽…
알선비 가로채는 브로커 기승
  • 입력 : 2018. 04.04(수) 21:00
강행옥 광주 고려인마을 법률지원단장이 피해 고려인에 대한 법률 상담을 하고 있다. 광주 고려인마을 제공
국내 체류 고려인들이 각종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 특히 현행법상 외국인으로 분류되는 고려인들이 정기적으로 비자 갱신을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점을 알고 접근해 '영주권 취득'을 미끼로 금품을 갈취하거나, 취업을 시켜준다며 알선비만 챙기는 범죄행위가 잇따르고 있다. 광주에서는 지역 시민단체와 법률가들이 고려인 피해 회복을 위해 법률상담을 진행하는 등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불안정한 법적 지위와 언어의 장벽, 취업조차 여의치 않은 고려인의 여건상 제도적 변화 없이는 범죄의 표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난해 8월 광주 동부경찰은 영주권을 취득해 주겠다며 고려인들을 속여 돈을 가로챈 혐의(사기)로 김모(44)씨를 구속했다. 김씨는 지난 2016년부터 2017년 4월까지 A(44ㆍ여)씨 등 고려인 3명에게 1430만원의 돈을 받아 가로챘다. 김씨는 '자녀들의 영주권을 취득해 주겠다'고 고려인들에게 접근해 사기 행각을 벌였다.

현행 재외동포법에 의하면 고려인 1~3세대는 외국 국적 동포로 분류돼 최장 3년까지 국내 체류가 가능하다. 문제는 고려인 4세부터다. 이들은 만 19세가 되면 90일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한다. 외국 국적 동포에서 제외돼 법적으로 외국인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점을 노려 고려인들에게 접근해 영주권 및 학생비자 취득을 미끼로 금품을 갈취하는 이른바 '영주권 브로커'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특히 광주 광산구 월곡동에 자리잡은 고려인마을은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고려인 집단거주지이기에 범죄에 노출되기 쉽다.

현재 고려인마을에는 4000여명의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중 고려인 4~5세는 200명 이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대개 10~20대인 고려인 4~5세대들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이천영 새날학교 교장은 "부모를 따라 국내로 넘어온 고려인 4~5세들은 현행법상 외국인이기 때문에 만 19세를 넘기는 시점부터 3개월마다 비자 갱신을 위해 본국을 다녀와야만 한다"면서 "수백만원에 달하는 항공료와 취업 단절 등 부담이 있어 영주권 브로커의 사기 행각에 넘어가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취업을 시켜준다면서 알선비만 챙기거나 불법근로를 할 수 밖에 없는 고려인들의 불안한 법적 지위를 이용해 임금을 체불하는 행위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게 고려인마을 관계자들의 얘기다. 이는 특히 주로 20대인 고려인 4세들이 자주 겪는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 고려인 4세부터는 재외동포법 적용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상 3개월짜리 방문비자만 발급된다. 그나마 국내 대학이나 어학당에 입학할 경우에만 유학비자를 받을 수 있다.

문제는 해당 비자들로는 국내 취업이 금지된다는 점이다. 당장 성인이 된 고려인 4~5세들은 생활비는 물론 비자 갱신을 위해 본국에 다녀올 항공료를 마련해야 하지만 합법적으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실정이다. 유학비자를 받아 비교적 장기 체류가 가능한 고려인들도 사정은 같다.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려면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지만 무엇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천영 새날학교 교장은 "새날학교 출신 고려인 4~5세 중에서도 국내 대학에 진학을 한 학생들이 다수인데 유학비자를 받아도 근로가 불법이다보니 어려움이 많다"면서 "이는 사실상 고려인 4~5세들은 국내 대학에 다니지 말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제도 변화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다수 고려인들은 인근 하남공단이나 평동산단에서 불법 근로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취업을 미끼로 접근하는 브로커들에게 속아 피해를 보거나, 불법 근로자라는 점을 이용해 임금을 체불하는 악덕 업주들의 횡포에도 말 한 마디 못하는 사례가 많다. 신분이 불안정하다 보니 다른 외국인 근로자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고려인마을 한 관계자는 "최근 출입국관리소에 고려인들이 공단에서 불법 근로를 하고 있다는 신고가 연이어지면서 단속이 이뤄져 벌금은 물론 추방 위기에 놓인 이들까지 나오고 있다"면서 "사정을 알아보니 다른 국적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업주에 대해 불만을 갖고 애꿎은 고려인들을 신고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업장에서 불법 근로가 적발되면 업주도 벌금을 물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광주 체류 고려인들의 범죄피해가 잇따르면서 지역 시민단체와 법률가들이 고려인 피해 회복을 위해 무료 법률상담을 진행하는 등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있다. 지난해 6월에는 고려인마을 법률지원단이 발족했다. 광주YMCA시민권익변호인단장인 윤춘주 변호사를 비롯해 강행옥, 김경은, 김나윤 등 총 13명의 변호사가 참여 중이다. 생활법률, 전세보증금, 채권 등 민사, 산업재해, 체불임금, 기타 노동 분야 등으로 한국어가 서툰 고려인들이 스스로 해결하기엔 버거운 내용들을 주로 다룬다.

이들은 월별로 조를 짜 주 1회 법률상담에 임하고 있다. 법률상담 후 자력으로 분쟁을 해결할 능력이 없어 소송까지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법률지원단은 분쟁을 끝까지 해결해 준다는 목표를 갖고 무료소송도 지원하고 있다. 또 고려인 범죄 피해 예방을 위해 고려인에 대한 법적 지위 확보, 언어ㆍ법률 교육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강행옥 광주 고려인마을 법률지원단장은 "고려인들이 각종 범죄에 노출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어가 서투르고 법률 상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영주권 사기 등은 사전교육을 통해 충분히 예방이 가능한 범죄인만큼 고려인 대상 교육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단장은 이어 고려인에 대한민국 국적 부여 필요성도 역설했다. 고려인을 표적으로 한 범행 대부분이 이들의 불안정한 법적 지위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 단장은 "고려인들은 유전적으로 우리와 같고, 언어, 종교, 풍습 등에서 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며 "주권을 상실한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고국을 떠나 갖은 고초를 겪었던 고려인 후손들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밝혔다.

김정대 기자 jdkim@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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