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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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칼럼
나는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
  • 입력 : 2018. 05.22(화) 21:00




"나는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 지금은 갈 수 없습니다. 죽으면 갈 수 있겠습니다." 허철선 목사(Charles Betts Huntley)

2017년 6월 12일 오전 제자 홍장희 목사와 만난 허철선 목사는 한국에 가고 싶다고 얘기한다. 그 답으로 홍장희 목사는 "당신은 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환영할 것입니다. 당신이 한국에 갈 수 있도록 약속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한다. 그 뒤 17일 후인 2017년 6월 29일 행복한 가정여행 후에 허철선 목사는 타계한다. 홍장희 목사가 약속드린 대로 2018년 5월 17일 오전 10시 생전에 그렇게 오고 싶어했던 광주에서 우리는 허철선 선교사 유해 안장 예배를 드렸다.

마샤 헌트리와 그의 자녀들이 허철선 목사의 유해를 품에 안고 광주에 왔다. 5ㆍ18기념재단의 초청으로 또 다른 5ㆍ18의 증언자였던 아놀드 피터슨의 부인 바바라 피터슨 여사와 피터슨 여사의 큰 아들과 함께였다. 5ㆍ18의 현장에서 그의 남편들과 함께 생사를 같이 했던 두 부인은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광주에 그렇게 왔다. 연로하여 장거리 여행에 많이 피곤했지만, 그녀들은 온 힘과 마음을 다해서 광주 사람들을 만났고 남편들의 꿈과 만났다.

광주에서의 첫날인 15일에 온 헌트리와 피터슨 여사는 오월어머니집 사람들과 사랑했던 제자들의 환영을 받았고 따뜻한 가족의 시간을 보냈다. 15일 오후에는 광주광역시청에서 광주시장과의 만남을 가졌다. 그 뒤에 5ㆍ18기념재단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에서는 마샤 헌트리는 여사는 허철선 목사에 대해 소개했다. "남편은 광주를 사랑했습니다. 한국인의 모든 것을 좋았습니다. 5ㆍ18 기간에는 학생이나 이웃들이나 행인들도 많이 부상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혈액이 필요했고, 많은 사람들이 헌혈을 하려고 병원으로 왔습니다.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많은 젊은이들이 공격을 당하고 부상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젊은이들은 무기를 가진 군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보도블록, 파편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았고, 가장 용감한 분들은 택시기사였습니다. 그 분들은 군인들에 의해서 골목 등을 쫓겨 다니면서도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나의 남편 허철선 목사는 그 당시의 사진을 찍었다. 그 당시의 외신들에게 전달하여 5ㆍ18의 진상을 세계에 알렸고, 한국기자들에 의해서도 외부에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라고 자신과 남편 허철선 목사에 대해서 소개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북한군에 개입이라는 부분에서 일축했다. 헌혈이 필요해서 붉은 적십자기를 차에 달고 돌아다녔는데 그 부분을 북한군의 개입으로 매도하는 부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은 전두환정권이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광주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그 당시의 헬기에서의 공격을 사진으로 담아낸 아놀드 피터슨 부인은 남편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바바라 피터슨부인은 "남편은 1990년도에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 2015년도에도 타계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도 남편은 광주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회만 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리고 말년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렸습니다. 아내와 자식도 몰라보던 남편은 어느 날 자기에게 와서 지금 거실에 우리가 보호해야 할 광주사람들이 와 있다고 빨리 와서 보호하라고 말을 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이쪽으로 오세요 하면서 남편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렇게 5ㆍ18은 광주사람들에게도 큰 슬픔과 평생의 트라우마였다면, 5ㆍ18을 목격하고 함께 했던 그분들에게도 광주는 평생 내려놓을 수 없는 아픔이었고, 반면 광주의 5월과 함께했던 것은 자부심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한 남편과의 추억이 있는 광주를 향한 그녀들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은 그 이후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계속 되었다.

지난 16일 5ㆍ18기념재단이 주최한 아시아포럼 일정과 오후에 오월어머니집에서 오월어머니들과의 만남에서도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허철선목사가 안성례 의원에게 전달하여 전홍준 외과의사에게 전달했던 사진을 받아서 당시 이태호 기자(동아일보 해직기자)에게 전달하였다. 바로 이태호 선생이 마샤 헌트리를 만나기 위해서 광주를 방문한 것이다. 이태호 기자는 38년 동안 자신에게 전달된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 궁금하였는데, 그 진실은 자신이 살아서는 알 수 없는 역사의 비밀로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홍준 선생이 마샤 헌트리 여사가 광주에 오고, 그 사진이 허철선 목사가 준 사진이라는 것을 전해 듣고 한달음에 광주에 내려온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만남은 뜻 깊었고, 오랜 역사의 한 페이지가 정리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16일 밤에 그들이 함께 했던 허철선사택(현 THE 1904)에서 '허철선의 밤'이 진행되었다. 행사는 조대여고 인권동아리 학생들이 준비한 영상과 허철선 부분의 사진등이 준비되었고, THE 1904 아카데미와 KOG school 학생들이 준비한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광주에서 생활했던 공간과 5ㆍ18당시에 20여 명의 사람들을 피난처가 되었던 공간을 함께 한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그 당시의 이야기를 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샤 헌트리 여사는 광주를 떠나기 전에 '허철선의 밤'은 천국이었다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렇게 분주하고 피곤한 일정이었지만, 그녀들은 남편들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서 광주 사람들에게 그날의 진실을 알렸고, 자신들이 기억하고 있는 그날의 기억을 증언하였다. 함께하는 우리에게는 숭고함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 밤은 따뜻했으며 또한 슬픔이었다. 가족들에게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지고 보내야 하는 밤이었고, 우리에게는 시대의 스승을 보내드려야 하는 슬픔의 밤이었다. 그 밤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고, 서로의 존재를 기뻐했다.


홍인화

The1904 대표ㆍ전 광주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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