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장마기가 지나면 단연코 햇살이 오는 것을…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암울한 장마기가 지나면 단연코 햇살이 오는 것을…
장마와 전혜린
31세 자살…순수.정신적 자유
내 유년을 구원하였던 전혜린
  • 입력 : 2018. 06.28(목) 21:00
  • edit@jnilbo.com
뉴시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전혜린

“장 아제베도!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줘! 정말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나도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 내 속에 있는 이 악마를 나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악마를 쫓아 줄 사람은 너야. 나를 살게 해줘.” 전혜린의 마지막 편지, 결국은 부치지 못한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몸부림치게 하였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아마도 이 편지를 부칠 수만 있었다면 불행한 결론은 수정되지 않았을까.

수많은 평론가들이 전혜린을 말했음에도 나는 그 까닭을 헤아려보지 못했다. 1965년 새해를 시작한 어느 날 스스로 돌아갔다고 했다. 본디 왔던 곳이리라. 어머니가 미리내 궁문을 열어 나를 이승에 내려놓으신지 얼마나 지났을까. 고작 몇 번의 해와 몇 번의 달이 지고 떴을 뿐이니 내가 그녀를 알 턱이 없다. 실제 그녀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오랜 날들이 지난 후에야 나는 짐작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녀가 돌아갔을 곳 또한 자미원 언저리 무리 진 어느 별 동네일 것이라고.

산정(山頂) 향해 시지프스의 바위 굴리던 사춘기

채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나는 지게 써레를 지고 논일을 하였다. 늙은 아비가 남기고 가신 사래 긴 논을 일궈야했기 때문이다. 어둡고 암울했던 날들이었다. 예순여섯의 아버지는 조상제사를 잇는다는 일념으로 나를 이 땅에 데려오셨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 제삿날은 동네 잔치였다. 초등(국민)학교 선생님들이 한 무리로 다녀가시면 마을 사람들이 다음 순번이었다. 가능한 많은 음식을 장만하였다. 우리 집 제사가 있는 날 아침이면 으레 몇 차례에 걸쳐 마을 방송을 했다. “에~또 ‘웃동네’ 이윤선이네 집 제사를 지냈습니다. 모두 오셔서 음식을 자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성년이 된 후에야 나는 제사음식 나누자는 마을 방송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랑하고 싶으셨다. 환갑진갑 다 지난 나이에야 아들을 두었어도 조상제사 하나 만큼은 이렇게 훌륭하게 지낸다는 것을.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오랜 중풍의 고통을 훌훌 벗어던지셨다. 내가 제사를 모시는 것도 보지 못하신 채. 그때로부터 내 사춘(思春)의 날이 시작되었다. 앞도 뒷도 보이지 않던 칠흑 같은 날들이었다. 유년을 벗은 후의 일이긴 하지만, 전혜린의 문고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없었다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산정을 향해 밀어 올리던 시지프스의 바윗돌에 깔려 죽었을 것이다.

돌아서던 그 길에 이름 모를 들꽃 하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유년의 다복함으로부터 숨 막힐 청년의 날이 오리란 것을. 네다섯 살 때였다. 가위눌리는 꿈을 꾸다 일어났다. 길고 긴 터널 속에 까치인지 까마귀인지 검은 새 두 마리가 서 있었다. 끝도 없는 동굴이었고 암흑이었다. 무엇이 무서웠을까. 자다 깨어 그토록 서럽게 울어댄 적이 또 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놀라 일어나 나를 다독이셨다. “가위 눌렸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새들이 나와 동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형제를 남겨두고 아버지가 먼 길을 떠나셨으니. 그랬다. 그 가위눌림은 유년을 지나 청년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전혜린과 장 그르니에를 끼고 음유시인 김정호의 노래를 부르며 살았다.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다 침대를 만들었다. 아마도 침대에 대한 동경은 전혜린으로부터 왔을 것이다. 뮌헨인지 슈바빙인지 그 음울한 안개와 정원들과 비 내리는 풍경들에 대한 환상을 키워갔다. 내게 전혜린은 나주사람 백호 임제가 술 한 잔 따라 올리던 황진이었나.

한 세대를 앞서 간 황진이를 그리며 백호 임제는 노래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었느냐”. 길고 긴 장마 기간에는 전혜린을 꿈꾸기 안성맞춤이었다. 방에 불을 지피지 않았다. 음습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싸는 것이 좋았다. 그러잖아도 음기가 강한 장마임에랴.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았다. 몸은 점점 위축되고 마음 또한 안개 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장마였을 것이다. 이슬비 추적추적 내리던 망뫼산에 올랐다. 내가 왔던 별로 다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삶에 대한 미련이 더 컸던 것일까? 지나치던 돌담 아래 들꽃 하나가 그렇게도 서러울 수가 없었다. 복 바쳐 오르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토해내고 말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 시간도 없었다. 아무 공간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 흔적도 없는 사건이 도대체 말이 되는가?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돌아서던 그 길에, 이슬비 젖어있던 내 마을의 풍경들이 사무치도록 아름다웠다. 아마도 내 평생에 접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 길던 장마 걷히고 나면.

그러고 보니 나를 구원한 게 한 둘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전혜린은 장마 때만 되면 나를 돌아보게 한다. 아시아의 온갖 섬들을 돌아다니며 장 그르니에의 수상들을 곱씹어왔다. 음습하고도 절절한 김정호의 노래가 아니었으면 정말 어쩔 뻔 했는가. 그 꽹과리 울리는 소리와도 같고 어머니의 사무쳐 부르는 외침 같기도 한 노래들 말이다. 무엇이 나를 음의 기운으로부터 양의 기운으로 돌아서게 했던 것일까. 혹시 돌담 아래 한 송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들꽃이었을까. 무언가 무게 있고 획기적인 사건이 아니라 눈길조차 사로잡지 못하는 그 하찮음들 말이다. 장마가 걷히고 나면 새벽마다 집 뒤 망뫼산에 올랐다. 봉화터에 올라야 숨을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명의 어스름을 헤치고 여린 맹감 잎을 스치며 단숨에 뛰어오르던 망뫼산은 그나마 해방구였다. 갯강을 막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소포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붉은 햇살을 받은 강물이 꿈틀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햇살은 해모수요 강물은 유화였다. 금와 왕의 요구대로 방안에 갇힌다한들 뿜어 나오는 태양의 기운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 한줌만으로도 유화의 포임(包妊)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내 아픈 청년기, 그 암울한 장마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단연코 소포만의 아침과 살아 오르던 그 햇살들이다. 미당을 키운 건 팔 할이 고창의 바람이었다더라만 나를 키운 건 구 할이 소포만의 햇살과 바람과 사람들이었다.

장마를 이겨내는 법

장마는 음(陰)의 에너지가 쌓이는 시간이다. 해마다 장마 때가 되면 내 유년을 구원하였던 전혜린을 떠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개와 적막, 종일 비 내리는 방안에서 뚫어져라 쳐다보던 막힌 벽들, 그곳에는 양의 기운이 서릴 틈이 없다. 음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통계로 봐도 장마기간에 우울증 환자가 급증한다. 자살률이 급증한다는 보고도 있다. 전혜린이 공부했던 유럽은 음기라는 손님이 찾아오는 시기가 우리와 다르다. 유럽과 동일하게 통상 겨울이 음(陰)의 에너지가 배회하는 시기요 여름이 양(陽)의 에너지가 준동하는 시기라 한다. 그렇다. 하지만 몬순 지역의 장마는 여름철에 도둑처럼 찾아와 양의 기운을 절단 내고 만다. 그래서 무섭다. 전혜린은 유럽의 예를 좇은 때문인지 겨울 어느 날을 택해 스스로 미리내로 돌아갔지만 나는 그 길고 길던 장마기에 자미원으로 돌아갈 궁리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말했던 페시미즘(염세주의)을 서성이게 하는 주범이 혹시 이 음의 기운들이지 않는가.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이 음습한 기운들이 죽음의 에너지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장마는 일 년 강수량의 거의 전부를 확보해주는 살림의 기간이기도 하다. 단비는 봄비에만 붙이는 수식이 아니다. 이 긴 기간의 물이 있기 때문에 만물의 성장이 확보될 수 있다. 따로 지면을 만들어 보완하겠지만 ‘긴(長) 물(마)’은 물의 때를 말하는 관행에서 온 이름이다. 남도지역에서는 조석간만의 물때를 ‘한물, 두 물...’이라고 하고 ‘한마, 두마, 서마…’라고도 한다. 곧, 장마는 ‘긴 물의 시간’임을 알 수 있다. 긴 물이 있으면 짧은 물이 있을 터, 음의 기운이 가면 양의 기운이 온다. 오히려 장마가 끝난 후 급습하는 양의 에너지를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음습한 음에너지의 청년기를 이겨내고 양에너지의 장년으로 돌아선 까닭을 사례 삼아 오늘 이 글을 쓴 것은 딱 한 사람, 지금 심한 우울증에 걸려 장마에 갇힌 바로 당신을 위해서다. 당신 안의 악마를 두려워하지 말고 장 아제베도에게 부디 편지를 부칠 수 있기를.



남도인문학 TIP 전혜린의 일생



전혜린의 일생 위키백과 및 몇 가지 정보를 인용하여 전혜린의 삶에 대해 요약하고 공부자료로 삼는다.

1934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조선총독부 고급관리 전봉덕의 딸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다.

전봉덕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이고 이후 군인, 변호사를 역임한 사람이다. 2002년 공개된 친일파 명단 708인,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모두 올라있다.

전혜린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하지만 1955년 독문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독일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에 유학한다. 독어독문학 학사, 막시밀리안 대학교 조교를 거친다. 유학시절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 1956년 독일유학생 법학도인 김철수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 딸의 이름은 김정화(1959~)다. 이 딸을 낳자마자 1959년 4월 귀국하였다. 1964년 이혼하였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강사,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1964년 성균관대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펜클럽 한국본부 번역분과위원을 역임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등 10여 편을 번역하였다.

1965년 1월 10일 자택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전혜린의 사망을 보도한 신문들을 보면 불면증으로 수면제를 복용해왔음을 밝히고 있다.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 뮌헨 문학기행편을 보면 세코날 마흔 알로 생을 마감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1966년 유고 수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68년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가 출판되었다. 1994년 수필 ‘목마른 계절’은 두 수필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사)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 이사장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전남도 문화재전문위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edit@jnilbo.com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최신기사 TOP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