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예술인들 물심양면 후원…'메디치 정신'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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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예술인들 물심양면 후원…'메디치 정신' 보여줘
■ 근대예술물·수집가 발굴해 문화·예술을 입히자
<4> 메세나 정신으로 지역작가 작품 수집 고 임춘평 원장
  • 입력 : 2018. 09.09(일) 18:02
  • 박상지 기자 sangji.park@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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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지닌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계몽'과 '치유'가 아닐까. 시대정신의 산물인 예술은 직접적인 혁명의 시발점이 될 수는 없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기본적인 가치를 일깨워 준다. 또 사회적 비극이나 개인적인 아픔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겐 예술을 통해 비극과 아픔을 함께 공유함으로써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53년의 짧은 인생을 살다 간 광주의 한 의사가 그의 황금기를 예술인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준 것은 예술이 가지는 위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의사였지만 사계절 '줄무늬 남방과 잠바'를 즐겨 입었던 그는 자신에게는 한없이 인색하고 남에게는 물색없이 관대했다. 그런 그를 두고 어떤 이는 '금남로 휴머니스트'라고 했고, 어떤 이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했으며, 또 어떤 이는 '비주류와 가난한 자의 광휘를 아는 자'라고 했고, 누군가는 1980년 5월 주먹밥을 나누었던 '딱 광주사람!'이라고 했다.
1980년부터 10년간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임춘평 피부과 의원을 운영했던 고 임춘평 원장이 바로 그다.
지난 5일 광주 동구 무등현대미술관에서는 의미있는 만남이 이루어졌다. 정송규 무등현대미술관장과 홍인화 전 광주시의원, 전영원 광주 동구의원, 윤경미 기획자, 장경화 광주시립미술관 학예관, 양경모 작가, 그리고 임춘평 원장의 미망인 박영자 수필가와 둘째딸 임복희 바이올리니스트가 참석한 이 모임은 지역 예술가들을 위한 메세나 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광주사람 임춘평을 기리는 모임'(가칭)은 지난 7월 임 원장의 둘째딸인 임복희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버지의 소장품 200여점을 어떻게 보관,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홍인화 전 광주시의원과 의논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논의의 출발은 1970~80년대의 시대상이 담긴 지역 작가들의 예술작품들을 시민들과 공유하자는 차원이었지만 모임이 거듭될수록 메세나 정신을 확산시키기 위한 내용으로 이어지게 됐다. 임 원장의 삶 자체가 메세나와 다르지 않았던 까닭이다.
지역 중견, 원로 작가 중 그로부터 장학금이나 도움을 받지 않았던 이가 없다고 전해질 정도다.
정송규 무등현대미술관장은 "등록금을 낼 수 없어 고민하는 소식들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여린 마음의 소유자, 한꺼번에 다섯명 이상의 등록금도 도맡아 주셨던 오지랖 넓은 성격, 진료 중에도 은행으로 뛰어가 등록금을 손수 내주신 사람으로 기억되는 임춘평 선생님의 병원에는 늘상 환자 뿐 아니라 일수 찍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진풍경이 펼쳐지곤 했다"며 "어려움을 못 보는 그의 성품은 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돈을 빌려서 등록금을 내어주고 일수로 갚았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1937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임춘평 원장은 소학교 2학년 시절 해방을 맞아 귀국, 함평에서 자랐다.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술을 베푸면서도 황진이 시를 좋아했고 이태백의 생활을 동경했으며 천상병 시인에게 막걸리 한섬 권하고 싶어했던 그의 기질은 예술가에 가까웠다. 일제치하와 독재정권, 민주화운동까지 대한민국 역사의 고비고비를 목격하고 온몸으로 경험했던 탓이었을까. 유독 울분에 찬 한을 미술로 승화시켰던 또래 작가들을 위해 주머니를 털었다.
진료가 끝나면 영흥식당을 비롯해 광주 동구 금남로와 충장로 골목골목 허름한 식당에서 미술인들을 벗 삼아 수없이 소주잔을 주고받았다. 특유의 유머와 위트로 술판을 즐겁게 만들어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미술인들이 북적거렸다.
우제길 서양화가는 "임춘평 원장은 문화 ·예술을 좋아하셨지만, 특히 그림쟁이들을 더 좋아하셨다"며 "처음에는 나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림값을 제대로 주고 구입한 작품은 마음에 드는 사람이면 그냥 주어버리셨고, 작가로부터 직접 선물받은 것은 절대로 남에게 주지 않으셨다. 돈으로 구입된 작품들은 재산의 가치도 있으니 소장을 하는 것이 더 옳은 방법인데, 평범한 우리와 셈하는 방식이 달랐다"고 회상했다.
광주 서구 화정동 육군병원 주위 땅을 평당 500원에 매입할 기회에도 불구하고 20만원짜리 브리태니까 대영 백과사전을 자녀들에게 선물하고, 진도 조도 분교생 16명을 광주로 초청해 2박3일 먹이고 재우면서 수학여행을 책임지기도 했다. 본인도 셋방살이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민주인사들을 돕기 위해 판금된 책을 구입해 환자들에게 나눠주는가 하면 한 학기당 20~30명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위해 신용금고에서 일수를 낸 것도 일상적인 일이었다.
'보통사람들은 이해 못할 셈'에 관한 것이라면 몇 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정도다.
가족들의 생활이 늘 쪼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미망인 박영자씨는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그저 지나치지 못하는 남편의 천성 때문에 가족들은 늘 힘들었고 그의 월급봉투는 빈 봉투이기 일쑤였다"며 "아이들의 등록금 고지서가 나오면 창피함을 무릅쓰고 등록금 마련을 위해 선물로 들어온 양주 두병을 들고 대인시장에서 팔아보기도 했다"고 밝혔다.
1990년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레 세상과 이별한 임 원장이 남긴 그림은 200여점. 생전 남에게 선물한 그림까지 합하면 배가 넘는다. 황영성, 우제길, 이강하, 양수아, 최쌍중, 강연균, 홍성담, 김영태 등 욕심나는 원로, 중견 작가의 작품이 많지만, 자녀들은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유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집 한쪽에 쌓여있었던 그림들은 임 원장 유고 20년이었던 지난 2010년 무등현대미술관을 통해 지역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그리고 3년 후 전남대병원 갤러리에서 한 번의 초대전이 더 열렸다. 이후 현재까지 전시는 없었지만 '딱 광주사람'이었던 그의 나눔 정신은 '광주사람 임춘평을 기리는 모임'을 통해 본격 공유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임복희씨는 "언젠가 여건이 되면 그동안 아버지가 소장해온 많은 미술가들의 작품들을 시민들과 공유하고 싶었다"며 "1970~80년대의 의미있는 예술작품을 공유하는데도 의미가 있지만 생전 어려운 예술가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정신을 함께 나눔으로써 지역 예술인이 더 나은 환경에서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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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지 기자 sangji.park@jnilbo.com sangji.park@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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