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끌려가 노예 취급 받았던 아버지 한 풀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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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검찰
"일본 끌려가 노예 취급 받았던 아버지 한 풀어 달라"
강제동원 피해자 일부승소
헤이그 송달…4년만에 결론
위자료 1538만원 지급 주문
"국가, 피해 국민 보호해야"
  • 입력 : 2024. 05.22(수) 17:51
  • 송민섭 기자 minsub.song@jnilbo.com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고(故) 김상기 씨의 유족 김승익(66)씨가 22일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일본기업 가와사키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를 선고받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송민섭 기자
“개도 안먹을 밥을 주고, 노예같이 천한 대우를 받고 총알받이가 됐던 아버지의 삶이 너무나 원통합니다.”

22일 오전 광주지방법원 앞.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고(故) 김상기 씨의 유족 김승익(66)씨가 일본기업 가와사키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를 선고받고 울분을 토했다.

유족 김승익씨는 “아버지는 밤에 밖에 나갈 수 없을 정도로 트라우마가 심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돕지 않고 있다”며 “우리는 누굴 믿고 살아야 될지 모르겠다. 일본 기업은 당장 사과하고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의 사과를 이끌어내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8명이 손해배상을 신청했지만 제 상속분만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며 “아버지는 한이 맺혀 유언처럼 당시의 기록들을 하나하나 적어 기록했다. 아버지가 당시의 수모를 조금이나마 잊고 평안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상기 씨는 1945년 2월 일본 효고현 가와사키 주식회사에 강제 징용돼 6개월여간 강제노역했다.

당시 순천에 거주하던 김씨는 갑자기 징용 영장을 받고, 일본으로 끌려가 가와사키중공업의 기차 차량 제조공장에서 노역했다. 전쟁무기를 제조하는 공장에 징용된 김씨는 기관차와 전투기 등을 만들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로 일본의 패색이 짙었던 당시, 군수공장에 대한 미군전투기의 집중 폭격으로 총탄이 빗발치고 머리를 스치는 경험으로 죽음의 공포를 겪어야 했다.

혹시나 도망갈까 봐 기숙사 외출도 금지됐고, 식사는 잡곡밥에 볏짚을 갈아 만든 빵이 나왔다. 김씨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지푸라기에 왕겨 등을 섞어 만든, 빵이라고 부를수도 없는 반죽 덩어리로 매끼니를 때웠다.

강제노동의 고통과 함께 평생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됐다. 억울함을 풀고자 당시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가와사키차량주식회사의 주소 등을 경위서에 정확히 기록해놓고, 죽어서라도 한을 풀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씨는 생전 남긴 진술서에 “징용 시기 하루에도 몇번씩 생명에 위협을 느꼈고, 당시 겪었던 정신적 피해는 글로 표현할 수도 없다”고 적었다.

일제강점기 가와사키중공업 강제동원 피해자 고(故) 김상기씨가 생전 강제동원 피해를 적은 경위서.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김씨는 2015년 숨졌고 유족들은 김씨의 한을 풀고자 2020년 1월 가와사키 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탓에 소장 송달이 지연됐고, ‘헤이그 송달’을 거치느라 몇 년간 공전하다 지난해 변론이 시작됐다.

헤이그 송달협약은 협약 체결국 간 재판을 진행할 때 관련 서류를 송달하기 위해 맺은 국제 업무협약으로, 한일 간 소송 서류는 한국 법원-법원행정처-일본 외무성-일본 법원-당사자 경로로 전달된다.

김씨는 강제노역 경험이 생생히 담긴 여러 경위서를 작성하는 등 수기 문건들을 남겼다. 이번 재판에서 가해를 인정하지 않는 피고 측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사용됐다.

4년간 공전을 거듭한 소송은 이날 원고 일부승소로 결론났다. 광주지법 민사3단독 박상수 부장판사는 이날 가와사키중공업이 손해배상금 1538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문해 김씨가 입은 피해를 인정했다. 당초 청구금액은 1억원이었으나 상속 채권 양도 시점 문제로 일부만 인정됐다. 가와사키중공업과 관련된 일제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은 광주·전남지역에서 이번이 처음이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원고는 대한민국법을 준거법으로 판단한다. 원고가 주장하는 손해배상채권은 대한민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청구권협정의 대상에 포함됐으므로, 위 채권은 청구권협정의 체결에 의해 이미 소멸했다고 주장하나,위자료 청구원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고 판시했다.

이어 “이는 당시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한다. 피고는 피해자인 망인이 입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강제징용 관련 소송은 30일 광주지법 별관 206호에서는 이광래씨 외 14명이 홋카이도 탄광기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변론기일, 6월 25일 광주지법 별관 208호에서 이자한씨 외 1명이 제이에스금속을 대상으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선고기일이 진행된다.
송민섭 기자 minsub.so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