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똑같이 내릴 비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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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똑같이 내릴 비를 기다리며
오지현 취재1부 기자
  • 입력 : 2025. 07.23(수) 17:03
“오늘 하늘 완전 파랗고 미세먼지 제로잖어. 어제 비 왕창 온 덕분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속 박 사장네 사모님으로 등장하는 ‘연교’의 대사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폭우로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구호소에 내몰린 기택의 가족과 달리, 박 사장의 가족에게 그날의 비는 상쾌한 공기를 안겨준 단비에 불과했다.

이 대사는 최근 전국을 덮친 폭우의 잔혹한 아이러니를 다시 끌어올린다. 지난 16일부터 20일까지 쏟아진 장맛비로 전남 곡성에는 430㎜ 넘는 폭우가 내렸고, 나주와 무안, 담양, 화순 등에서도 침수 피해가 속출했다. 같은 기간 광주시는 177억9000만 원, 전남도는 488억3000여만 원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고, 정부는 피해가 가장 컸던 담양군을 우선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했다.

비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지만, 피해는 늘 아래쪽부터 번진다. 도시보다 농촌이, 아파트보다 단독주택이, 도심보다 하천변 마을이 먼저 잠긴다.

이는 단지 날씨 탓만은 아니다. 수십 년간 하천 정비 예산은 대도시에 집중됐고, 지방자치단체는 해마다 예산 부담에 시달리며 재난 대비에 한계를 겪고 있다. 폭우가 내릴 때마다 침수된 지역의 대피 매뉴얼은 여전히 ‘종이 공문’에 머무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한 “과하다 싶을 정도의 재난 피해와 사고 예방”은 테이블 위의 텍스트로만 존재할 뿐, 현장에서는 체감되지 않는다.

같은 비가 와도 어떤 집은 창문을 열고 커피를 내리지만, 어떤 집은 젖은 이불을 끌어안고 체육관 바닥에 몸을 뉘인다. 어떤 이는 어제 내린 비 덕에 미세먼지 없이 파티를 즐길 수 있겠다고 기뻐하는 반면, 누군가는 침수된 집, 가게에서 그나마 쓸 수 있을 만한 살림살이를 구해내느라 바쁘다. 누군가에겐 단비였을 폭우는, 지역민에게는 삶 전체를 잠식하는 재난이었다.

그 차이는 기상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 폭우의 원인은 기후지만, 피해의 경로는 사회가 정한다. 어디에 살고,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느냐가 생존의 조건이 되는 현실. 우리가 기후 위기를 견뎌야 하는 이유는 자연 때문이 아니라, 이 구조를 바꾸지 않는 무관심 때문이다.

다음 폭우가 언제 다시 올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피해가 어디를 향할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이 반복을 멈추려면 기후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를 먼저 바꿔야 한다. 재난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일. 이제는 그 구조적 전환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