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위안부, 근로정신대로 끌려간 780만명의 애환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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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징용, 위안부, 근로정신대로 끌려간 780만명의 애환 '생생'
<13> 부산 국립 일제강제동원역사관
국가적 차원 위안부 전시물 설치
동영상 등 고작 아쉬움
  • 입력 : 2017. 10.10(화) 00:00
징용과 위안부 등으로 끌려간 인원이 780만명을 넘을 정도로 강제동원은 식민지 백성들이 피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부산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의 자본, 기술, 문화의 창구다. 시대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에 의한 한인 수탈의 최종 출구이기도 했다. 그곳에는 아직도 인적 강제동원의 상처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징용,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위안부 등 강제동원자들은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어디론가 끌려갔다. 이제 그들은 하나 둘 세상을 뜨고, 당시의 실상은 자료와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부산시 남구 홍곡로 320번길, 야산을 베개삼은 역사관이 눈길을 끈다. '국립 일제강제동원 역사관'으로, 2015년 개관했다. 독특한 외관에 강제동원역사관이란 게 낯설어 보인다. 지상 3층에 지하4층 구조로 7만 5465㎡부지에 건물 연면적만 1만 2062㎡ 규모란다. 부산에 국립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들어선 이유는 뭘까. 역사관 해설사는 "일제 강점기 때 부산항이 대부분의 강제 동원 출발지였고, 강제동원자의 22%가 경상도 출신이라서 역사성과 접근성 등을 감안해 2008년 부산에 건립 방침을 확정했다"고 설명했다.

상설 전시실을 찾았다. '일제강제동원의 기록들을 담다'란 주제로 묻혀왔던 역사의 진실을 전달하는 전시공간이란다. 먼저 4층 안내데스크를 지나 '기억의 터널'이 나왔다. 굳이 4층부터가 아니라면 거꾸로 6층에서 내려오는 방식도 추천할 만하다. 4층 전시관은 기억의 터널을 지나면 이어 강제동원의 시작, 실체, 해방과 귀환, 끝나지 않은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기념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곳곳에 다큐 영상, 애니메이션, 관람객 참여형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전시물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일제 강제동원은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자행한 인적ㆍ물적 동원과 자금 통제를 총칭한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후 일본은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본격적으로 조선인에 대한 강제동원을 실시했다. 이 법은 일본 정부가 의회의 동의 없이도 일본 본토는 물론 식민지와 점령지의 인력, 물자, 자금을 총동원하여 전쟁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전시통제 기본법이다. 일제가 제정한 조선인 강제동원 관련 법령은 △1939.7 국민징용령 제정 △1943.07 조선인 징병제 △1944.8 여자정신근로령 공포(12~40세 여성 노무동원 근거) △1944.10 학도근로령 공포 △1945.03 국민근로동원령 공포 (국민징용령 등 5개 칙령 폐지통합) 등 이다.

역사관 해설사는 "조선인으로 강제동원된 인원수는 782만7355명으로 1942년 당시 조선의 인구총수가 2636만 명임을 감안할 때 거의 30%에 육박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성인 남녀의 대부분이 일제의 전쟁 도구로 강제 동원된 셈이다. 전시관은 차분하게 자료 중심으로 강제동원의 역사를 설명해주는데, 때로는 조금 단조롭다는 느낌도 든다. 어쩌면 역사의 현장이 아닌, 그냥 박제화 된 전시관이 주는 무미건조함이랄까. 전시물도 피해 기증자들의 사진물이 많은데다, 대부분 강제동원 현장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라서 '강제'라는 느낌을 강제하지 못한 듯 싶다. 이들의 절절한 편지와 수기가 좀더 많았으면 좋을 듯 싶은데….



또 다른 상설전시실, 기억을 나누어 상처를 치유하는 코너다. 강제동원 과정, 조선인 노숙자 숙소, 탄광, 중ㆍ서부 태평양 전선, 일본군 위안소, 귀환, 시대의 거울 등 순서로 구성돼 있다. 일제강제동원의 현장들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재현 및 모형이 대부분이다. 일본군 위안소 코너에서 발길을 멈췄다. 대한민국 국가가 만든 유일한 위안부 기억 공간이다. 여성동원, 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 이후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명분으로 식민지의 젊은 여성을 일본군이 설치한 위안소에 감금하여 성노예 생활을 강요하였다. 동원된 인원은 4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일본은 성노예 자체를 부인하고 있으며, 박근혜 정부는 아예 더 이상 논의하지 말자고 말문을 닫았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북핵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한ㆍ일의 과거사는 '안정적으로 관리'하기로 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는 논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늘상 위안부 문제는 현재의 현안에 밀려난다.

그래서 일까. 국립으로 만든 위안부 코너는 다소 실망스럽다. 전체 공간은 가로 4~5m, 세로 20여m 의 직사각형으로 철조망 쳐진 입구를 지나면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이어 동영상 주변에 그들이 당한 성노예 현장을 재현해 놓은 방이 있다. 다시 위안부를 그린 애니메이션 한편이 방영된다. 그리고는 끝이다. 일본의 3대 전쟁 범죄의 하나라는 위안부, 너무 부실하거나 애쓴 흔적이 적은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벽을 채운 사진을 본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기증 사진을 붙여 놓았다. 퇴색한 흑백사진 몇 장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일제의 징용에 응한 사람임을 뜻하는 '응징사'(應徵士)라는 흉장을 달고 있는 소년, 이마에 일장기를 질끈 맨 교복 입은 여학생…. 식민지, 나라 잃은 백성이 감내해야 했던 아픈 세월의 흔적들이다.

역사관측은 "앞으로 역사관을 '유족을 위한 추도, 기념시설'로서의 역할은 물론, '일제 강제동원 역사교육 공간'과 '지역 주민의 친환경적인 휴식 공간'으로 활용할 것"이라면서 "UN기념공원을 중심으로 착공된 UN평화기념관과 함께 UN평화문화특구로 지정됨에 따라 이 일대가 평화와 인권의 역사를 기억하고 체험하는 역사 관광 명소가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어느 도시보다 일본풍이 거센 부산에 일본을 기억하는 또 다른 공간이 있다. 용두산 공원에서 내려와 보수동 방면으로 가다보면 보이는 '부산근대역사관'이다. 일제 강점기 때 대표적인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이다.

1920년대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서 서구양식이 도입되는 당시의 건축 경향을 알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건물이라는 설명이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 숙소로 이용되다가 1949년 미문화원으로 개원한 후 부산시민들의 끊임없는 반환요구로 1999년 대한민국정부로 반환됐다. 부산은 외세 지배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건축물에 한국 근ㆍ현대사를 담았다. 개항기 부산, 일제의 부산수탈, 근대도시 부산, 동양척식주식회사, 근ㆍ현대 한미관계, 부산의 비전 등으로 꾸몄다.



강제동원역사관을 보면서, 일제 수탈이 가장 심했던 광주ㆍ전남에 왜 '일제 수탈역사관'이 없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일제가 가장 노골적으로 경제침탈을 자행했던 전남지역의 식민지 역사를 기억할 공간이 필요해 보인다. 나아가 일제 건물에 미문화원으로 사용된 그곳에 부산의 근현대사를 담은 것처럼, 광주 근대역사관이 있으면 한다. 광주는 옛 미문화원 건물을 헐고 주차장을 지었다. 80년 5ㆍ18진실규명과 반미 운동의 상징이었는데….


글ㆍ사진=부산 이건상 기획취재본부장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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