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창·조재호>에크리튀르와 경호란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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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창·조재호>에크리튀르와 경호란 어린이
조재호 무등초 교사
  • 입력 : 2024. 05.19(일) 18:18
조재호 무등초 교사
에크리튀르(ecriture)란 개념을 처음 들었을 때 떠오른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에크리튀르란 프랑스 언어학자 롤랑바르트가 만든 개념인데, 그저 어렵게만 느껴졌었어요. 그런데, 경호(가명)란 초등학생을 생각하며 막연히 이해됐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그 깨달음을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우치다 타츠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서 나온 에피소드입니다. 글쓴이는 학생들과 파리로 체험학습을 갔습니다. 박물관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지정된 장소(지하철역)를 돌아다닙니다. 무려 열 한곳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돌아온 대답은 “더 이상 서비스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우치다 교수는 이 경험을 토대로 에크리튀르란 개념을 설명합니다. 프랑스 사회는 매우 계층화된 사회입니다. 알제리 등 이민자들과 상류층의 삶의 양태가 완전히 다릅니다. 삶이 다르니 쓰는 ‘언어’ 자체가 다르겠지요. 같은 프랑스어지만, 그것을 말하는 방식, 톤, 태도, 어휘마저 차이가 납니다. 우치다 교수가 만난 지하철 근무자들은 모두 똑같이 “나는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박물관 패스권을 어디서 파는지 나는 몰라요, 하지만, 내가 좀 찾아볼께요”라는 말을 듣지 못했답니다. 그저 “여기서는 팔지 않는다”는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다른 장소로 가보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하루종일 돌아다닌 후 들었던 말이 “지금은 서비스를 중단했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에크리튀르란 개념은 계층마다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언어가 달라진 것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개념입니다. 상류층들은 언어 사용이 유연한 것에 반해 하층계급의 경우는 언어들이 고정될 가능성이 높다합니다. 자기 집단만의 고유한 언어들, 비속어들, 특수한 용어들로서 ‘공동체’소속감을 느끼죠.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하위집단일수록 “나는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류계층일수록 재산, 지위, 지식에서 연결된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그러나 하위계층들일 수록 자기 집단속에서만 정체성을 누리기에 “모르는 것”을 묻거나 해결해줄 연결망이 부족할 가능성이 높은 편이란 것이죠, 그래서 선생님을 찾고, 선생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지식, 도움을 얻는 예절을 배울 기회가 현저히 떨어진다고 합니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은 “성장하기 위해서 세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자기가 모른다는 것, 둘째는 잘 알고 있는 선생을 알아보는 것, 셋째는 선생에게 배우기 위해 필요한 예의범절을 갖추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장을 위한 에크리튀르는 계급이나 계층과는 무관하게 배울 수 있는 것이 됩니다. 무지를 깨닫고 선생을 구하고, 예절을 배우는 것!

난 경호라는 어린이를 떠올렸습니다. 3학년부터 6학년까지 체육, 영어, 티볼로 만난 어린이입니다. 얼마 전, 대화를 나누다가 “저는 스승의 날에 항상 유치원에 찾아가요”라고 했습니다. 많은 어린이들을 만났는데, 유치원으로 스승의 날에 선생님을 찾아가는 친구는 처음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경호와 시간을 보내며 알게 된 여러 가지 파편의 진실 속에서 이해를 하게 됩니다. 경호는 아버지와만 생활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을 가끔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경호는 선생님들에게 무척 총애를 받는 어린이입니다.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교사가 하는 말을 신뢰하고, 경청하며 이를 행하려 합니다. 그렇다고 모범생 느낌은 아닙니다. 다만, 교사에 대한 신뢰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것이 아마 유치원때 형성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에 대한 애착을 채워줬던 유치원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했졌습니다. 그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에크트튀르가 경호가 적어도 초등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 중 하나로 성장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경호는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늘 솔직히 말하고(티볼, 영어, 수학…), 선생님에게 주저 없이 “선생님, 도와주세요” 라고 부탁합니다. 거기에 더해 그는 가르쳐주고 싶은 예절을 갖춥니다. 매우 간절하고 절실한 표정과 공손한 자세. 이런 학생에게 어떤 교사가 가르쳐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경호의 에크리튀르는 그 아이가 속해있는 객관적인 ‘지위’나 ‘계급’과 상관없이 이미 가장 고상한 것입니다. 이 푸르른 오월, 나는 어린 경호를 돌봐주고 사랑해줬던 경호의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진한 연대감을 느낍니다. 또한 경호가 앞으로 만날 수많은 미래의 교사들에게도 같은 희망과 뿌듯함을 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