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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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입력 : 2015. 09.04(금) 00:00

지난달 7일 오후. 곡성군 석곡면에서 곧 아흔을 바라보는 한 어르신을 만났다. 한 때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김기상 옹. 방에 누워있었던 그는 한 눈에 봐도 쇠약한 모습이었다. 김 옹은 마을 초입에 세워진 비석의 글을 비롯해 석곡면 일대에선 그의 필체를 곳곳에 발견할 수 있다. 쇠약해진 김 옹은 방의 책상 위에 작은 종이를 올려 놓은 채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라를 빼앗겨…'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글의 내용은 곡성군 석곡면 석곡초등학교 내 '해방기념비'에 관한 이야기였다.

몸을 일으킨 김 옹은 기자에게 석곡 해방 기념비와 관련된 묵혀둔 이야기를 한참 동안 풀어놨다. 그 와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어르신 마저 계시지 않았더라면 해방기념비에 대한 이야기는 영원히 세상 밖에 나오지 못했겠구나."

현재 석곡면에서 이 해방기념비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김기상 옹 뿐이다. 기념비가 세워진 석곡초등학교의 관계자를 비롯해 면사무소, 곡성군청, 심지어 수십여년동안 석곡면에서만 살아온 주민들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렇게 제대로 된 관리도 받지 못하고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세월만 보내 왔던 석곡 해방기념비와 비슷한 기념비가 강원도 양양에도 있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중복리 마을회관 맞은편의 전봇대 옆에는 작은 기념비 하나가 세워져있다. 중복리 김극수 이장은 "비석에는 한글로 '조선해방기렴비'라고 쓰여있으며 그 옆에는 '1945년 8월 15일'이라 새겨져 있다"며 "현재 군이나 면사무소에서 따로 관리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념비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였다.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기념비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뜬 상태였다. 역사 속 진실이 묻혀버린 셈이다.

석곡면은 김기상 옹 덕분에 강원도 양양 기념비와 같은 안타까움은 겨우 면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달 13일, 본보에 실렸던 '석곡 사람들 '해방기념비' 왜 세웠나'의 기사도 김 옹의 기억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보도 이후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안타깝지만 여전히 관리 주체는 없다. 누구 하나 해방기념비의 기억을 되살려 나라 잃은 슬픔과 치욕, 그리고 해방의 기쁨을 공유하려는 노력이 없다는 얘기나 다를 바 없다.

이제는 석곡리, 중복리에 있는 기념비를 비롯해 지역에 역사적인 사료가 있다면 어떤 기관이든 책임지고 관리에 신경을 써야한다. 특히 관련 사료의 유래는 꼭 기록으로 남겨둬야만 의미가 있다. 미국의 소설가인 노만 메일러는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고 말했다. 조상들의 의미있는 행동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후손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때다.

김건웅 지역사회부 기자 gwkim@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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