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의식과 자연관의 결합… 호남 서양화단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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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미의식과 자연관의 결합… 호남 서양화단의 선구자
오병희의 남도 미술산책 오지호
광주를 상징하는 예술가
'무등산의 별' 별명도
밝고 맑은 한국적 색감
  • 입력 : 2017. 12.15(금) 00:00


오지호를 비롯한 남도의 서양화가들은 우리자연을 밝고 맑은 색으로 작가가 자연의 본질에 대해 느낀 독창적인 생각을 담은 작품을 창작하였다. 남도의 아름다운 풍경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예술가의 미의식과 자연관이 결합되어 개성 있고 독특한 호남 서양화단의 전통이 만들어졌다.

오지호는 호남 서양화단을 조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예술가다. 오지호가 1948년 광주에 정착한 이후 호남 서양화단은 밝고 맑은 한국적인 색을 기본으로 작가의 개성을 담은 독창적인 화풍이 주도하게 된다.

남도 서양화단의 작가들은 밝고 풍부한 빛에 감성을 담아 자연에서 느낀 생명감을 나타냈으며 이러한 작품의 양식은 남도 서양화 큰 맥이 되어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





한국적 색 추구

오지호는 휘문고보 재학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에게 그림을 배웠다. 이후 1926년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배웠으며 유학시기 일본 화단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 외광파 화풍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오지호는 외광파 화풍이 일본의 풍토와 기후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고 우리 민족의 따스한 감성과 빛, 아름다운 우리나라 풍토에 맞은 독자적인 화풍의 작품을 창작한다.

오지호는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미술운동 단체인 녹향회의 주축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오지호와 김주경은 1931년 녹향회 2회 전시를 개최할 때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족예술은 명랑하고 투명하고 오색 찬연한 조선자연의 색채를 회화의 기조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인이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일본적 암흑의 색채를 버려야 한다"고 민족주의 예술 관점을 제시하였다.

녹향회에서 추구한 예술의 목적은 일본 풍토에 기인한 어두운 색의 작품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색을 찾고자 한 민족주의 예술운동이다.

이러한 오지호와 김주경이 주축이 된 녹향회는 1932년 3회전을 구상하다 총독부의 방해로 전시가 무산된다.

이후 오지호는 선전에서 조선화가들의 일본색의 추구와 선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본제국주의의 의도에 대해 비판하였다.

오지호는 1935년부터 10년간, 민족주의자들이 운집해 있는 개성송도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애국사상을 가르쳤다.

송도고보 시기인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원색화집인 '오지호ㆍ김주경 이인화집'을 김주경과 함께 발간하였다.

원색화집의 발간목적은 빛에 의한 맑고 깨끗한 풍경을 가진 우리나라의 자연을 표현하기 위해 생명과 빛에 기반을 둔 독창적인 작품이 한국 화단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1942년 5월 총독부에서 오지호에게 전쟁기록화를 그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총독부가 권장하는 전쟁기록화는 참여 않겠다. 억지로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한다면 차라리 붓을 꺾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총독부에서는 채색 배급을 중지하고 아국의 정책에 불응하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인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1944년 전면 징용제가 실시된 이 후 용산헌병대에서 반일 지식인으로 분류 된 오지호를 체포하기 위해 헌병대를 파견하자 오지호는 개성을 탈출해 함경남도 단천, 철산의 최남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해방 후 작품 활동

해방 바로 전 전남 화순 동복집으로 온 오지호는 고향에서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서울로 올라가 조선미술건설본부 임원 등을 지내면서 3년 동안 서울에 머무른다.

1948년 8월, 오지호는 혼탁한 화단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서울을 등지고 광주에 정착한다. 1948년 광주에 광주미술연구소를 설립하였으며 1949년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 호남 서양화단의 큰 흐름을 만든다.

오지호는 광주와 호남 서양화단을 상징하는 예술가가 되었으며 오지호를 일컬어 무등산의 별, 무등산의 산신령 등 광주를 상징하는 무등산의 호칭이 붙여진다.

오지호는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1960년 4ㆍ19 혁명 때 있었던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혐의로 5ㆍ16 군사정변 다음날인 5월 17일 구속된다.

혁명재판에 회부된 오지호는 1심에서 7년형을 언도받고, 상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1년 가까운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위궤양이 발생하여 정신적, 신체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 결국 1961년부터 1963년까지 3년간의 공백이 발생하였다.

이 시기 가끔 붓을 들어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1960년대 오지호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어두운 색채를 띤다. 이 시기에도 오지호는 1965년 전남도전을 만들어 남도 미술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와 같이 오지호는 일제강점기 민족주의자로서, 해방 후 지식인으로 지조 있는 삶을 살아간 예술가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오지호의 사회활동으로는 1968년 '자유공론' 등에서 한자교육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이희승, 박두진 등과 함께 한국어문교육연구회를 창립하여 국ㆍ한문 혼용운동을 펼쳤다.

또한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1971)를 발간하였으며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의 80% 이상이 한자어로 국어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한자교육이 불가피하다는 한자교육론을 펼쳤다.

그리고 문화재 보호 운동과 양심수에 대한 구명운동을 펼쳤으며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건의문을 신문에 발표한다.

예술가 오지호는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그 안에 우리 민족의 따스한 감성을 표현한 한국적인 작품을 그린 예술가이다.

그리고 한국의 빛에 의한 밝고 맑은 자연을 보고 느낀 생명감을 담은 오지호의 작품은 호남 서양화단에 많은 영향을 준다.





호남 서양화단의 스승

해방 후 남도 서양화단은 오지호 등 많은 화가들이 아름다운 우리 자연에 관해 느낀 감흥을 화폭에 담았으며 이러한 전통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지호는 1948년 광주미술연구회를 결성하여 광주 미술을 선도하였으며, 1949년 조선대학교 미술과 교수로 부임한 이후 10년 동안 오승우, 조규일, 박남재 등 많은 후학을 가르쳤다.

또한 1959~1960년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에서 아들인 오승윤(9회)을 비롯해 송용, 홍진삼(10회), 강연균, 김인화, 임병규, 지광준, 최쌍중(11회), 박동인, 배동환(12회) 등에게 소묘와 수채화를 가르쳤다.

당시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미술의 기초인 소묘를 강조한다.

강연균에 따르면, 오지호는 "화가는 데생을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정도를 걸어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데생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다 가짜 그림이 되고 만다"고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말한다.

또한 오지호는 제자를 가르칠 때 사실적인 표현 이외에 빛의 변화에 따른 인상적인 표현과 마음의 변화에 따른 형태의 변형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오지호는 1956년 '조선일보'에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회화만이 가질 수 있는 '데포르메'에 의한 창작을 강조한 글을 기고하였다.

신문에 "회화는 데포르메에 의해서만 우리들의 정신으로 하여금 현실의 자연과는 별개의 자연,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자연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지호는 회화란 자연을 보면서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은 정신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감인 데포르메를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오지호의 작품관은 조선대학교 미술과 학생들과 조대부고 미술반 학생들에게 이어져 자연을 넘어선 생명감을 표현한 독창적인 호남서양화단을 형성하게 된다.

오지호에게 그림을 배운 오승윤, 송용, 최쌍중은 독창적인 화풍을 이룬 서양화가로 한국 미술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대가이다. 그리고 박동인, 배동환은 추계예술대학교와 신라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쳐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시대의 아픔을 표현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족미술가인 강연균은 민족예술총연합회 공동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양여대 교수인 여운은 민족미술협회 회장으로 민중미술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러한 오지호에 의해 형성된 호남서양화단은 오지호 후임으로 임직순이 1961년 조선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한국화단에서 확실한 자리를 잡는다.

임직순에게 배운 제자들로는 황영성, 이태길, 송용, 김재형, 문옥자, 국중효, 정송규 등이 있으며 이들 예술가들에 의해 남도 서양화단의 구상계열 흐름이 확립되었으며 19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열게 되며 1980년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진다.

이와 같이 오지호를 비롯한 남도 서양화가들은 남도의 자연에 대한 감흥을 바탕으로 밝고 맑은 색으로 자연의 보이지 않은 생명감과 본질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남도 서양화단은 한국의 자연을 보고 이를 작가의 개성을 살린 색과 새로운 조형기법으로 그린 독자적인 화풍의 작품들이 전통으로 대내외로 인정받고 있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정서 담은 '남향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남향집'(1939)은 한국적인 소재와 빛에 의한 밝고 깨끗한 색으로 우리 민족성을 담은 정겨운 그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근대미술 걸작이다.

'남향집'은 오지호가 살던 개성 송악산 아래 오관이란 동네에 있던 초가집을 그린 작품으로 한국적인 초가집의 흙담, 따사로운 양지에 담 밑에서 졸고 있는 백구, 귀여운 소녀를 통해 따뜻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난다.

'남향집'에서 대문을 열고 나오는 소녀는 오지호의 둘째 딸 금희이며 대추나무를 기준으로 왼쪽은 사랑채, 오른쪽으로 작은 창살문이 있는 화장실과 토담이 있다. 1948년 오지호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처음 대중들에게 선보였으며 당시 '사양'(斜陽, 25호)으로 출품된다. '오지호 첫 개인전 목록'(1948)에 오지호는 작품에 관해 설명한다.

목록에는 '이른 겨울 빛이 따뜻한 어느 날 오후 남향 초가집의 흰 벽과 그 앞에 있는 늙은 대추나무의 수많은 가지와 음양의 교차를 그린 작품'으로 기록하였다.

즉 오지호가 1939년 초겨울, 개성 초가집에서 빛에 의한 음양의 조화를 보고 우리 자연과 한민족 정서를 담은 작품이 '남향집'이다.

흙담, 초가지붕에 비추는 양지는 노랑과 황토색을 사용하여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나며 대추나무 고목의 그림자를 밝고 맑은 청색으로 빛의 본질을 나타냈다.

오지호의 '남향집'은 빛을 통하여 한국적인 정서와 민족적인 색채의 내면화를 이룬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근대미술작품으로 평가되어 2013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오병희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사ㆍ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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