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유전자·서홍원> 두 가지 운명을 가진 아킬레우스-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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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유전자·서홍원> 두 가지 운명을 가진 아킬레우스-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두 번째 이야기
서양 고전 및 영국문학의 전통(3)
서홍원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 입력 : 2023. 04.19(수) 18:01
서홍원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아킬레우스와 파견단.
지난 이야기에서 아킬레우스의 첫 번째 분노가 그가 사랑했던 브리세이스(Briseis)를 아가멤논(Agamemnon)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했다. 단순히 이렇게 보면 아킬레우스가 조금은 찌질하게 보이겠지만, 최상의 전리품(geras)이었던 브리세이스가 아킬레우스의 명예, ‘티메’(time)를 상징한다고 본다면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왜 ‘메니스‘(menis), 즉 신들의 분노를 나타내는 단어로 표현했는지 이해가 된다.

명예를 잃은 아킬레우스는 바다의 여신 중 하나인 어머니 테티스(Thetis)를 통하여 제우스 신에게 간청한다. 자신이 전쟁에 불참하는 동안에는 트로이 사람들이 우세하도록 해달라고. 그 이후 아카이아(그리스)인들은 연이어 고배를 마시고 대표적인 장수들이 부상을 입어서 최악의 위기를 맞는다.

이에 아가멤논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아킬레우스에게 파견단을 보내서 자신이 빼앗은 전리품, 명예를 몇 곱절 배상할 것을 약속한다. 그 배상 내용에는 손을 대지 않은 브리세이스의 반환과 더불어 자신의 딸 중 하나의 선택권, 또 그에 합당한 결혼 지참금 등 최상의 전리품(따라서 최상의 명예)를 상징하는 것들이 있다.

이 내용을 전달할 파견단 또한 그 명예에 합당한 자들로 구성되는데, 아킬레우스를 영웅으로 키운 노장 포이닉스(Phoenix), 거인 아이악스(Giant Ajax), 그리고 달변의 오디세우스(Odysseus)가 핵심이다.

그러나 아가멤논의 최상의 전리품도 무용하고 오디세우스의 달변도 침묵하게 하는 것이 아킬레우스의 반응이다. 그는 아가멤논이 자신의 여인을 빼앗았음을, 그로 인해 자신의 명예를 빼앗았음을 상기시킨다.

아카이아인들이여, 우리가 왜 트로이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까? 아트레우스의 아들, 그는 왜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었나요? 왜, 도대체 왜,

나부끼며 윤기 나는 머리카락의 헬렌이 아니었다면?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들, 그들만이 세상에서 오로지

자신들의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들인가요? 전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것을 사랑하고

아낍니다. 내가 그녀를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것 같이.

비록 내 창으로 그녀를 획득했지만…

그런데 이제 그가 내 전리품을* 빼앗고 나를 속였으니,

그를 너무나 잘 아는 나를 그가 다시 유혹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나를 설득하지 못해요.

(*전리품: 브리세이스를 말함)

아가멤논에 대한 증오를 적나라하게 말하는 아킬레우스는 그의 명예를 드높일 엄청난 전리품들을 거부한다. 그리고 노장 포이닉스는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어떤 분노가 그대의 마음에 자리잡았는가?” 주목할 점은 이때 말하는 ‘분노’는 더 이상 신들의 분노인 ‘메니스’가 아닌 비정상적인 감정으로서의 분노를 나타내는 ‘콜로스’(cholos)이다.

이로써 아킬레우스의 분노의 이야기는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선다. 이전까지가 정당한 분노였다면 이 시점부터 그의 친구 파트로클루스(Patroclus)의 죽음까지의 분노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분출에 불과하다. 나중에는 더 파멸스러운 분노의 과정을 거쳐서 트로이 왕 프리암(Priam) 앞에서 분노가 녹는 결말까지 가지만, 이것은 다음에 할 이야기이다.

아가멤논의 화해를 거부하는 가운데 아킬레우스는 자신에게 부여된 두 개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고대 그리스의 ‘운명’은 수명을 말한다. 세 명의 운명의 여신들(Moirai)은 각각의 역할이 있는데 한 여신은 운명을 실을 베틀에서 짜내고, 다른 여신은 그 길이를 재며, 마지막 여신은 잰 길이만큼의 실을 자른다. 이것이 생명의 실, 수명을 나타내는 실이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의 운명만을 부여받지만 인간 이상의 면모를 보여주는 아킬레우스는 이례적으로 두 개의 운명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다.

내 어머니 테티스가 말하기를 두 겹의

운명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내가 여기 남아 트로이와 싸운다면

나는 귀환을 못하지만 불멸의 영광을 얻을 것이고,

만약 내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내

영광스러운 명성은 없어지지만 내 삶은 오래될

것이고, 죽음도 금방 오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개념이 소개된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분쟁에서 ‘명예’, 티메의 중요성을 알게 되듯, 이번 아킬레우스의 말에서 어쩌면 티메보다도 더 중요한 ‘영광’, 클레오스(kleos)를 알게 된다. 클레오스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면서 쌓이는 명성에 의해 증진되는데, 아킬레우스의 말을 통해서 이 시대의 용사들이 두려움 없이 전쟁터로 나갈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일종의 등가 교환이 이뤄진다고 볼 수 있겠다.

아킬레우스의 첫 번째 운명은 전쟁터에서 짧게 생을 끝내는 대신 영광을 획득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것도 단순한 영광이 아닌 ‘불멸의 영광’, 클레오스 앞티톤(kleos aphthiton)을 얻게 된다. 죽음으로써 죽지 않는 영광을 얻는다는 아이러니한 공식이다.

두 번째 운명은 그 반대로, 전쟁터에서 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어찌어찌 살아서 안전하게 귀환하는 시나리오인데, 긴 삶은 보장 받는 대신 영광을 잃는 공식이다.

이미 이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아는 우리는, 지금은 아가멤논의 회유를 거부하지만, 아킬레우스가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 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