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길 연 뽕할매, 아비 눈뜨인 심청, 왕건이 반한 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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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이야기
바닷길 연 뽕할매, 아비 눈뜨인 심청, 왕건이 반한 오씨
[임영규의 마실이야기] 전설과 역사 속 남도여인들
  • 입력 : 2016. 12.16(금) 00:00
진도 회동리 바닷가에 있는 뽕할머니 석상.
젊은 시절, 진로 등의 문제로 힘들어할 때, "잘 될 거야, 걱정마라"며 어깰 다독여주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시던 어머니. 자신감에 넘쳐 들떠있을 때, 꼼꼼히 더 생각하고 진중함을 잃지 마라며 신신당부하던 아내.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에 힘입어, 두렵지 않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사감선생님처럼 또박또박 깨우쳐주는 아내덕분에, 진정한 내 모습을 냉정히 비쳐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거나, 앞으로도 계속 날카로운 조언으로 많은 도움을 줄 사람 역시 여성이다.

아내만큼이나 자주 대하고 있는 또 한 여성이 있다. 아예 내말은 들을 생각도 않고 일방적으로 이래라저래라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정확히 맞는 말이다. 그리고 곰곰이 따지고 보면, 모두 날 위한 것이다. 이리저리 헤매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가려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잔소리명령에 무조건 따라야만 한다. 명석한 그녀는 내비게이션속의 여인이다.

동서고금의 신화와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위대한 여성의 이야기가 꽤 많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 남자로서 조금은 자존심 상하지만, 솔직히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 프랑스 계몽기의 대표적 철학자 볼테르(Voltaireㆍ1694~1778)는 "남자가 아무리 이론을 늘어놓아도, 여자의 한 방울 눈물에는 당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무슨 연유에서 지어낸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말 역시 심히 공감이 가는 표현이다.

신비로운 자연현상에 얽힌 전설, 흥미 있는 고전소설, 역사의 획을 그은 운명적인 사건 등을 통해, 지금까지 알려져 오고 있는 이 땅의 여성들이 있다. 지극한 효심과 희생으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어린소녀, 왕이 될 장군의 마음을 움직여 훗날 왕후가 된 지혜로운 여인, 가족을 만나기 위한 간절한 기원으로 바다를 가른 할머니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곳을 찾아, 남도여인들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헤아려본다.

진도 신비의 바닷길 뽕할머니

1975년, 진돗개 연구자료 수집 차, 진도를 방문했던 주한 프랑스 대사 삐에르 랑디는 우연히 바닷길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신기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 길이 2.8㎞, 폭 40여m에 이르는 이 바닷길은, 조수간만의 차(差)로 인해 해저에 있는 사구(沙丘)가 일정시간 수면위로 드러나는 자연현상이 만들어낸 길이었다.

그는 난생처음 보았던 기이한 목격담을 "나는 한국의 진도에서 현대판 모세의 기적현상을 보았다"고 프랑스 현지신문에 소개했다. 그때부터 이 신비의 바닷길이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게 되었다. 1998년, 진도군은 지역 자연자원을 세계적 관광지로 부각시켜준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을 조성하였다. 신비의 장면을 그대로 조망할 수 있는 삐에르랑디 공원은 회동고갯길 해발 120m 지점에 있으며, 대사의 흉상과 기념비가 서있다. 또한, 1996년에는 일본의 대중가수 '텐도 요시미'가 이 바닷길을 소재삼아 '바다가 갈라져요, 길이 생겨요. 섬과 섬이 이어져요"로 시작되는 노래(珍島物語)를 불렀었는데, 일본에서도 히트하며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었다.

회동리 바닷가에는, 하얀 석상으로 조각된 전설의 뽕할머니와 호랑이가 앞섬을 응시하며 서있다. 500년 전, 당시 회동마을 앞바다는 지금처럼 바닷길이 열리지 않았었는데, 인근에는 호랑이가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의 침해가 심해지자 마을사람들은 배를 타고 가까운 모도로 도망쳤다. 하지만, 경황 중에 최고령의 할머니를 남겨놓고 떠났던 것이다. 빈 마을에 홀로 남은 할머니는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드디어 용왕의 은혜로 바닷길이 열려, 떠났던 사람들과 재회의 기쁨을 맛보았으나, "나의 기도로 바닷길이 열려 너희들을 만났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기진해 그만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진도군은 신령이 된 뽕할머니를 모시는 영등제를 지내면서, 매년 3~4월 '신비의 바닷길 축제'도 개최하고 있다. 올해 '만남이 있는 신비의 바다로'라는 주제로 열렸던 제38회 축제에는 미국, 중국, 일본 등 외국인 8만5천명을 포함, 59만에 달하는 관광객이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3년 연속 대한민국 최우수축제로 선정되어 국비지원을 받고 있으며, 축제가 열리는 고군면 회동과 의신면 모도 일대는 국가명승 제9호로 지정(2000년도)되었다.

곡성 천하제일 효녀 심청

"내 딸이면 어디보자. 어디 내 딸 좀 보자. 내가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볼 수 있지. 아이고 답답하여라." 딸 심청이 버선발로 우르르 뛰쳐나와 목을 안고 아버지라 부르짖자, 앞을 못 보는 심학규가 깜짝 놀라면서 내뱉는 말이다. 그리고는 이내 눈을 몇 번 끔적끔적하더니만, 마침내 두 눈을 번쩍 뜨고야 만다.

감격의 부녀상봉 바로 뒤, 또다시 상상할 수 없는 기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잔치에 참석한 맹인들이 모두 눈을 떠버리는 것이다. 창자(唱者)는 이 장면을 회오리바람처럼 빠른 휘모리장단으로 거침없이 묘사한다. "가다 뜨고, 오다 뜨고, 서서 뜨고, 앉아 뜨고, 실없이 뜨고, 어이없이 뜨고, 울다 뜨고, 웃다 뜨고, 떠 보느라고 뜨고, 시원히 뜨고, 앉아 놀다 뜨고, 자다 깨다 졸다 번뜩 뜨고…." 마지막 추가 클라이맥스라고나 할까? 여기저기서 자신도 모르게 눈을 뜨는 모습들이 생생하게 연상되는 대목이다.

무엇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크나큰 희생정신을 지녔던 심청! 아버지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사람에게 빛을 선사해 준 효의 아이콘 심청이, 원래 곡성출신이었다고 한다. 1729년 곡성 관음사에서 제작되어 널리 배포된 목판본 사적(옥과현 성덕산 관음사 사적)에 새겨진 홍장설화(홍장이라는 효녀와 눈먼 아버지 이야기)의 원전을 배경으로, 훗날 심청전이 지어졌을 거라 추측하는데,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곡성이 오래전부터 효의 고장이라고 알려진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곡성군은 매년 심청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제16회)는 지난 9월,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된 섬진강 기차마을 일원에서 펼쳐졌다. 심청과 직접 연관 있는 프로그램으로는 심청관련 자료와 스토리모형이 전시된 심청주제관 운영, 전문배우들과 관광객이 함께 참여했던 심청행렬, 심청가 경연대회와 심청마당극 공연 등이 있다. 내년에는 10월 추석명절기간 내에 열리는데, 고향방문 향우들과 지역민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화합의 장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섬진강을 끼고 이어지는 국도 17호선, 곡성읍에서 10㎞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면, 심청이야기마을(송정마을)이라 새겨진 안내석이 세워져있다. 우측으로 뻗어있는 전라선 철도를 건너, 마을길을 잠시 오르다보면, 20여 채의 기와와 초가집으로 구성된 펜션형 마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여기가 조용하고 편안한 숙박여행휴식처로 소문난 심청한옥마을이다. 스토리가 담겨있는 모형관람과 함께, 앞 뒷산의 풍경도 아름답고 고즈넉한 한옥의 정취도 느낄 수 있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다.

나주 완사천 오씨부인

나주시청 300여m 앞, 국도변 도심공원 내에 매우 특별한 사연을 간직한 우물이 하나있다. 이곳은 고려태조 왕건과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부인이 처음 인연을 맺었던 장소로, 완사천(浣紗泉)이라 부르고 있다. 이 우물은 한자어 완(浣) 그대로 빨래샘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원래는 작은 옹달샘 형식이었는데 1986년에 새로 정비, 전라남도기념물(제93호)로 지정되었다. 천년의 역사를 도도히 이어온 것처럼,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특징을 지녔다고 한다.

고려태조 왕건이 수군의 장군으로 나주에 와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포구에 배를 정박시키고 물가 위를 바라보니 하늘 한쪽에 오색구름이 모여 있었다. 기묘함에 이끌려 그쪽으로 가보니 아리따운 처녀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은 처녀를 살필 겸, 일부러 목이 타는 척하며 물을 청했다. 그러자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 전했는데, 그 속엔 샘 옆 버드나무에서 뜯겨진 잎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니 대체 이 나뭇잎들은 귀찮게 왜 넣은 거요?" 속내가 궁금해 묻자, 처녀 왈 "목이 무척 마르신 것 같아 급히 드시면 체하실까봐, 천천히 드시게끔 그랬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총명함에 감동했는지, 아님 미모에 홀딱 반해서인지 몰라도, 왕건은 처녀의 신상을 묻고 바로 혼인을 언약, 두 번째 부인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장화왕후는 이미 샘터에서 왕건을 만나기 전, 바다의 용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기 때문에, 훗날에 전개될 역사를 미리 직감했을 것으로 풀이된다. 장화왕후와의 드라마틱한 만남으로 인해, 왕건은 지역기반을 탄탄히 다지게 되었고, 세력을 확대 응집하면서 왕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 무(武)도 태조에 이어 왕(혜종)이 되면서, 나주 처녀의 용꿈은 계속 대를 이어 현실로 나타났다.

임영규 전남도 관광문화정책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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